의사 차요한의 선택 (무통각증 환자, 안락사 논쟁, 고통의 의미)

 



의료 현장의 본질은 생명을 구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고통을 덜어주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오래전부터 의료윤리의 중심에 있었지만, 실제 임상에서는 종종 이분법적 답을 거부합니다. 교도소에서 만난 천재 의사 차요한과 레지던트 강시영의 이야기는 통증이라는 감각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의사가 환자의 고통 앞에서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지를 집요하게 질문합니다. 이 서사는 단순한 메디컬 드라마가 아니라, 생과 사의 경계에서 펼쳐지는 철학적 탐구입니다.


## 무통각증 환자, 통증을 진단하는 의사의 역설

차요한은 선천성 무통각증(CPA) 환자입니다. 그는 뼈가 부러지거나 살이 찢어져도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교도소에서 마취 없이 상처를 꿰매는 장면은 그의 특이한 체질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결핍은 단순한 신체적 특성을 넘어, 그가 의사로서 환자를 대하는 방식에 근본적 영향을 미칩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무통각증 환자는 내부 장기가 손상되어도 통증 신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맹장이 터져도 배가 아픈 줄 모르고 속이 썩은 다음에야 알게 됩니다.

차요한은 이 위험을 관리하기 위해 매일 자신의 바이탈을 기록합니다. 체온, 맥박, 호흡, 혈압을 빠짐없이 체크하며, 자신의 몸을 마치 기계처럼 관찰합니다. 이 기록은 생존 방식이자, 말하지 않는 몸을 살피는 그만의 전략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결핍이 오히려 환자의 통증을 더 집요하게 이해하려는 태도로 전환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환자의 미세한 증상 변화를 놓치지 않고, 10초 안에 진단을 내리는 "닥터 10초"로 불립니다. 62번 3열 8번, 즉 교도소 수감 번호로 불리던 그가 의무실에서 보여준 신속한 판단력은 전설이 되었습니다.

강시영이 처음 차요한을 만났을 때, 그녀는 그의 진단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생선 가시가 천공을 내고 상한 소시지에서 나온 세균이 천공에 침투해 경부 농양을 일으켰다는 진단은 투시 능력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능력이 아니라,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통증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쌓아온 관찰과 학습의 결과였습니다. 차요한은 자신이 느낄 수 없는 감각을 타인을 통해 배우며, 그 지식을 환자를 살리는 데 사용합니다. 이 역설적 구조는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모티프입니다.

## 안락사 논쟁, 고통을 끝내는 것과 생명을 빼앗는 것의 경계

차요한이 교도소에 수감된 이유는 말기 항문암 환자에게 치사량의 진통제를 투여한 혐의 때문입니다. 그는 3년형을 선고받았고, 언론은 그를 "살인 의사"로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윤성규 환자는 두 달 넘게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고, 차요한은 진통제를 줄여 의식을 유지하면서도 고통을 느끼게 했습니다. 호흡이 끊어지지 않도록 약을 조절하며, 환자는 계속 살아있었지만 동시에 계속 고통받았습니다. 영양 공급을 중단해도 살인, 진통제를 너무 많이 줘서 호흡이 끊어져도 살인. 차요한은 살인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서 환자의 숨만 붙여놓고 고통을 주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윤성규 환자가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고통을 끝내달라"고. 차요한은 그 말을 듣고 진통제를 투여했고, 환자는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강시영은 후에 윤성규 환자가 신약 임상 시험에 참여하기로 동의서에 사인까지 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살아보려고 했던 환자를 차요한이 죽였다는 의심이 생깁니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습니다. 동의서에 사인한 것을 안 것은 환자가 사망한 다음 날이었고, 차요한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만약 그가 알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아마도 그는 환자의 의지를 존중해 치료를 계속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안락사 논쟁의 핵심을 건드립니다. 차요한은 명확히 선을 긋습니다.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죽이는 게 아니야. 고통을 해결한다, 그러다 죽는다 할지라도 그게 전부야." 이 말은 완화 의료의 본질을 정확히 짚습니다. 의사는 환자를 죽이기 위해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개입합니다. 그 과정에서 생명이 단축될 수 있지만, 그것은 의도된 결과가 아닙니다. 반면 유리의 환자 사례는 또 다른 층위를 보여줍니다. 후각신경아세포종으로 안면이 기형적으로 변형되고 시각, 후각, 미각을 잃은 그녀는 아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소원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엄마"로 기억되는 것이었습니다. 차요한은 그녀의 호흡기를 끄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통을 덜어주려 했을 뿐입니다.

## 고통의 의미, 느낄 수 없는 것과 너무 많이 느끼는 것 사이

기석은 차요한과 같은 선천성 무통각증 환자입니다.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통증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남들이 다 하고 사는 것, 달리기, PC방, 배변 체크 없이 자유롭게 사는 것을 꿈꿉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기적이 찾아옵니다. 손이 시리고 따끔거리는 감각을 느낀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질병이 치료된 것이 아니라, 뇌가 자발적으로 통각 신호를 만들어낸 센트럴 센시티제이션 현상이었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통각 신호를 받아본 적이 없는 뇌가, 신호를 기다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극 신호를 만들어서 뉴런이 과흥분 활성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기석은 치료를 거부합니다. 처음으로 느낀 엄마의 따뜻한 손, 차가운 겨울바람, 축구를 할 때 나는 땀. 이 모든 감각이 그에게는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차요한은 그에게 경고합니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덥고, 마구잡이로 잘못된 신호를 받게 될 거야. 그건 신호가 없는 것보다 널 더 힘들게 할 거야." 하지만 기석은 대답합니다. "신호가 없는 게 어떤 건지 교수님은 모르시잖아요." 차요한은 침묵합니다. 그도 같은 환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석에게 자신이 매일 기록해온 영상을 보여줍니다. 몸에 있는 시한폭탄이 터지지 않았는지 하루도 빠짐없이 확인해온 기록들. 이것이 무통각증 환자의 생존 방식입니다.

결국 기석은 수술을 받기로 결정합니다. 잘못된 통증 신호를 보내는 뇌 부위를 자극해 통증을 제거하는 수술입니다. 수술 직전, 차요한은 기석에게 묻습니다. "어때?" 기석은 대답합니다. "따끔해요." 그리고 잠시 후, "왠지 마지막일 것 같아서요." 차요한은 말합니다. "그래, 마지막일 수도 있어. 준비되면 알려줘." 수술은 성공했습니다. 기석은 다시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차요한에게 약속을 받아냅니다. "언젠가 꼭 이 병을 고쳐주신다고." 차요한은 약속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노력할게"라고만 말했습니다. 이후 기석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고, 차요한은 수술을 강행하지만 끝내 살리지 못합니다. 이 죽음은 차요한을 무너뜨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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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요한과 강시영의 이야기는 의료 현장에서 마주하는 근본적 질문들을 우회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룹니다. 통증은 제거해야 할 대상인가, 아니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감각인가. 의사의 역할은 생명을 연장하는 것인가, 고통을 줄이는 것인가. 사용자가 지적한 대로, 이 작품은 안락사를 단순한 찬반 구도가 아니라 '고통을 해결하다 죽을 수 있는 것'과 '죽이기 위해 개입하는 것'의 윤리적 차이로 분리합니다. 차요한이라는 인물은 냉철한 천재 의사이면서 동시에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환자이고, 그 결핍이 오히려 타인의 고통을 집요하게 이해하려는 태도로 전환됩니다. 결국 이 서사가 묻는 것은 명확합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선택의 책임은 누가 감당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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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youtube.com/watch?v=ZMlvCNEGTMg&t=3121s